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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 스페인 · 포르투갈

세상의 끝에서 만난 또 다른 시작

익명2026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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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28일, 36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퇴직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8일, 나는 혼자 남미로 떠났다. 3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쌓인 수많은 기억을 잠시 내려놓고 싶었다. 낯선 대륙을 걸으며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펼쳐질 또 다른 삶의 출발을 준비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남미였다. 혼자 떠나는 긴 여정이었지만, 가장 믿음이 갔던 여행사인 ‘세상에 없는 여행’에 여정을 맡기고 미지의 남미 대륙을 향해 길을 나섰다. 잉카문명의 깊은 속살을 직접 들여다보고 싶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이식된 유럽 문명이 남미의 토착문화와 어떻게 만나고 충돌하며, 또 어떻게 어우러져 오늘의 남미를 만들어 왔는지도 궁금했다. 빙하와 사막, 대평원과 호수, 대서양과 태평양, 남미 대륙의 끝, 그리고 남미만의 독특한 가톨릭 전통까지…. 책이나 영상이 아닌, 내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듣고 온몸으로 남미를 느껴보고 싶었다. 그렇게 한 달여에 걸친 남미 5개국 여행이 시작되었다. 01. 사막에서 시작된 남미와의 첫 만남 사실상 첫 일정이었던 페루 이카 사막으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사막과 닭장,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경계 담장, 시골 시장과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강물, 그리고 태평양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든 풍경이 낯설었다. 그리고 그 낯섦이 좋았다. 여행 중 들른 타카마(Tacama)에서는 격조 높은 식사와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여행 초반의 긴장감을 내려놓고 비로소 ‘내가 정말 남미에 왔구나’라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카 사막의 오아시스와 거대한 모래 언덕에서 즐긴 샌드서핑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사막 위로 떨어지는 일몰을 온몸으로 맞으며 찍은 사진들은 아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특히 모래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와카치나(Huacachina)의 야경은 마치 사막 한가운데 숨겨진 파라다이스를 바라보는 듯했다. 와카치나에 전해지는 전설까지 듣고 나니 눈앞의 오아시스가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여행이 아니라, 그곳의 이야기를 알고 바라보는 여행. 내가 남미에서 하고 싶었던 여행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02. 태평양의 파도와 바예스타스의 생명들 페루 카사 안디나(Casa Andina) 호텔에서 맞이한 아침도 잊을 수 없다. 해변의 몽돌을 쓸고 지나가는 파도 소리. 파도가 밀려왔다 물러갈 때마다 바닷물이 작은 몽돌 사이를 스치며 빚어내던 시원하고도 경쾌한 소리. 지금도 그 소리를 떠올리면 마음 한편이 설렌다. 바예스타스 제도로 향하는 길에서는 고래들의 움직임을 만났고, 펭귄과 펠리컨, 바다사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비로소 남미라는 거대한 자연 속으로 들어왔다는 실감이 났다. 승선 전 포구에서 발견한 이름 모를 성상도 인상적이었다.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듯한 성상 앞에서 남미 사람들의 삶과 신앙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파라카스의 시원한 건축물과 독특한 디자인, 리마 해변 공원의 이색적인 풍경과 남녀가 포옹하는 조각상, 거리의 화려한 가로수 꽃과 노점에서 팔던 옥수수 과자…. 거창한 유적만이 여행은 아니었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는 작은 풍경 하나하나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고, 앞으로의 여행이 행복할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했다. 03. 쿠스코, 살아 숨 쉬는 잉카를 만나다 비행기를 타고 잉카문명의 본산인 쿠스코로 향했다. 고산지대라는 부담이 있었지만 안내자와 가이드의 친절하고 세심한 배려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 쿠스코 곳곳에 남아 있는 잉카의 거대한 석벽과 그 위에 덧입혀진 스페인 문화. 두 문명이 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과 식당에서 들려오던 음악, 곳곳을 장식한 잉카문명 관련 장식품들도 기억에 남는다. 음식 하나, 음악 하나, 장식 하나에도 이 지역의 문화가 배어 있었다. 쿠스코에 산재한 방대한 잉카 유적을 모두 볼 수 없었고 박물관을 충분히 둘러보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잉카인들의 생활과 직조 과정을 살펴보고, 다양한 과일을 맛볼 수 있었다. 거대한 내륙 염전인 마라스 소금광산(Salineras de Maras), 감자를 비롯한 식량자원의 재배 실험장으로 알려진 모라이(Moray)의 독특한 원형 계단식 지형도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라 포르타다(La Portada)에서의 식사는 특별했다. 맛과 향, 그리고 사람들의 정을 통해 잉카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유적을 보는 것만으로 문명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의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듣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볼 때 비로소 그 문명이 지금도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행사에서 배려해 준 마추픽추 현지 숙박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는 장대한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마추픽추의 밤을 보냈다. 그 물소리는 지금도 귀에 선명하다. 04. 마추픽추에서 다시 생각한 ‘물’ 다음 날, 수없이 사진과 영상으로 보아왔던 마추픽추를 직접 만났다. 거대한 산과 계곡, 그리고 그 속에 자리한 잉카의 도시. 나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하루 동안 무려 1,600장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며 다시 한번 느낀 것이 있다. 위대한 문명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힘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물의 관리’라는 사실이다. 험준한 산악지대, 잦은 지각변동과 지진의 위험 속에서도 잉카인들은 자연을 거스르기보다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고 활용하였다. 물을 흐르게 하고, 땅을 다듬고, 돌을 쌓았다. 마추픽추의 아름다움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큰 감동은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지혜였다. 05. 쿠스코 축제, 잉카의 후예들과 함께한 하루 여행 7일차에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운 좋게도 이날 쿠스코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관광객의 시선에서 조금 벗어나 그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시장을 찾아 빵과 과일을 사고 닭국수를 먹었다. 스페인풍의 2층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리에서는 지역별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옥수수와 감자, 과일을 나누어 주었다. 안전과 정화를 기원하는 물풍선, 풍요를 상징하는 독특한 조형물, 잉카와 스페인 문화가 결합된 퍼레이드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박물관 속의 잉카가 아니었다. 지금도 웃고 춤추며 살아가는 잉카의 후예들이 눈앞에 있었다. 그들에게 선물 받은 알 굵은 옥수수를 호텔에서 친절하게 쪄주었다. 그 옥수수 맛 또한 잊을 수 없다. 이날 호텔에서는 베이비 알파카 털로 만든 스웨터도 구입했다. 여행의 묘미 가운데 하나는 역시 쇼핑이다. 품질과 가격을 믿을 수 있어 만족스러웠고 함께 여행한 동료들도 신나게 물건을 골랐다.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래, 우리는 지금 참 행복하게 여행하고 있구나.’ 그 사실을 다시 느낀 하루였다. 06. 라파스와 우유니, 또 다른 남미 8일차에는 쿠스코를 떠나 볼리비아 라파스로 향했다. 대부분의 장거리 이동을 항공편으로 하였기에 비교적 여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라파스의 달의 계곡, 시민들의 중요한 대중교통 수단인 케이블카, 전통시장과 야경을 둘러보았다. 밤이 되자 산비탈을 따라 도시의 불빛이 끝없이 이어졌다. 마치 별바다가 땅 위에 펼쳐진 듯했다. 그리고 9일차. 그토록 보고 싶었던 우유니 소금사막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남미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든 귀여운 소녀와 사막 투어 차량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폐기된 기차들이 남아 있는 열차 무덤에서는 한껏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우리 차량을 운전한 기사님의 사진 실력이 전문가 수준이었다. 찍힌 사진을 확인해 보니 모두의 표정과 동작이 생동감 넘쳤다. 우리 팀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는 곳도, 살아온 길도 달랐지만 모두 2026년 2월 28일을 전후해 정년퇴직이라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가져간 캐논 EOS 5D Mark III로 이들의 남미 여행을 마음껏 담아주었다. 소금사막에서도 사진, 또 사진이었다. 다양한 소품을 이용하고 온갖 포즈를 취했다. “역시 남는 것은 사진이야!”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사진 속에 단순히 사람만 담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가 우유니 소금사막이다.’ ‘이 하늘은 남미의 하늘이다.’ 사진 한 장만 보아도 장소와 공기, 그날의 감정이 살아나도록 담고 싶었다. 소금으로 지어진 호텔에 짐을 풀고 호텔 곳곳을 촬영했다. 해 질 무렵에는 얕은 물이 고인 소금사막으로 다시 나갔다. 거울처럼 하늘을 품은 소금사막 위에서 일몰을 바라보며 와인 파티를 즐겼다. 그리고 또 사진을 찍었다. 평생 찍을 ‘인생 사진’을 이날 다 찍은 것 같았다. 모두가 참 즐거웠다. 07. 우유니의 은하수, 평생 잊지 못할 밤 다음 날 새벽, 우유니 소금사막의 일출을 찍기 위해 어둠 속으로 나섰다. 일출을 기다리며 카메라의 B셔터를 활용해 빛으로 ‘UYUNI’ 글자를 새기는 사진도 촬영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하수가 거대한 띠를 이루며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소금물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밤새 은하수와 남십자성을 바라보고 싶었다. 북극에서 만났던 오로라와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오로라가 하늘의 춤이었다면 우유니의 은하수는 우주의 깊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과 울림이었다. 누군가 우유니를 간다면 나는 꼭 말해주고 싶다. 낮의 소금사막만 보지 말라고. 가능하다면 반드시 밤하늘을 바라보라고. 그곳에는 우리가 평소 잊고 살아가는 거대한 우주가 펼쳐져 있다. 08. 알티플라노, 지구가 아닌 듯한 고원 사막 이어진 일정은 알티플라노 고원 사막 투어였다. 사막, 그리고 또 사막. 화성이나 달을 연상시키는 기묘한 지형과 소금호수, 그곳에 무리 지어 살아가는 홍학, 알파카를 비롯한 동물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중간 기착지의 전통시장에서는 현지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엄청나게 다양한 감자와 옥수수, 과일, 그리고 시장 음식들. 관광지가 아닌 삶의 현장이었다. 이날 숙소는 해발 4,600m에 자리한 사막 호텔, 타이카 델 데시에르토(Hotel Tayka del Desierto)였다. 호텔 라운지 한쪽에 놓인 산소통이 이곳이 얼마나 높은 곳인지 말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호텔의 구조와 주변 풍경, 전기와 물 공급 방식까지 모든 것이 고원 사막의 지형과 기후를 반영하고 있었다. 고산병으로 힘들어하는 동료들도 있었다. 나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카메라를 들고 호텔 안팎을 돌아다녔다. 저 멀리 화성 같은 산 너머로 태양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또 카메라에 담았다.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저녁 식사는 조용하고 감미로운 사막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맛있게, 냠냠…. 09. 고산을 넘어 칠레로 고원 사막 호텔에서 고산병과 한바탕 전투를 치른 뒤 11일차 일정을 시작했다. 해발고도가 점점 낮아지면서 모두의 컨디션도 서서히 회복되었다. 알티플라노 투어는 계속되었다. 드넓은 소금호수와 홍학 무리,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는 지열지대, 그리고 노천온천.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고원 사막을 바라보니 잠시 신선이 된 듯했다. 그야말로 힐링이었다. 칠레 국경에 도착하면서 볼리비아에서 함께한 기사님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 국경을 통과해 사막도시 아타카마로 향했다. 볼리비아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아타카마에 도착한 뒤 자유시간을 이용해 같은 시기에 퇴직한 동료 네 명과 식당을 찾았다. 음악 연주를 들으며 생선요리와 퀴노아 밥, 과일과 음료를 곁들여 맛있는 식사를 했다. 식료품점에서 과일을 사 호텔로 돌아와 느긋하게 쉬었다. 저녁에는 시장과 성당, 공원을 산책하고 거리의 모습을 구경했다. 커피와 디저트도 즐겼다. ‘우리가 여행을 온 것인가, 동네 산책을 나온 것인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그 여유가 참 좋았다. 10. 산티아고와 카사블랑카 밸리 12일차에는 항공편으로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거리 카페에서 아보카도가 듬뿍 들어간 칠레식 핫도그 ‘콤플레토(Completo)’와 칠레의 대표적인 여름 음료 ‘모테 콘 우에시요(Mote con Huesillo)’를 맛보았다. 행복한 점심이었다. ‘산티아고의 녹색 허파’라 불리는 산티아고 메트로폴리탄 공원에서는 도시 전체를 큼직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특히 푸니쿨라를 타고 정상에 오르는 경험은 다른 곳에서 쉽게 할 수 없는 서정적인 체험이었다. 스페인에 의해 건설된 도시의 획일적인 공간 구조를 살펴보면서 남미 도시문명의 또 다른 모습을 생각했다. 대통령궁과 전시 공간을 둘러본 뒤에는 오랜만에 한식을 먹었다.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풀리는 듯했다. 특히 소주 한 잔이…. 13일차에는 칠레의 유명 와인 산지인 카사블랑카 밸리의 와이너리를 방문했다. 친환경으로 재배한 포도를 직접 따 먹고 와이너리 내부를 자유롭게 둘러보았다. 와인이 특별한 상품이기 이전에 이들의 생활과 문화 속에 깊이 스며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개가 산자락에 적당히 걸린 날이었다. 와이너리의 풍경은 더욱 운치 있었다. 당연히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11. 발파라이소, 색으로 기억되는 도시 발파라이소로 이동했을 때는 또 다른 매력에 빠졌다. 칠레 해군 본부가 있는 항구도시답게 묵직한 역사의 향기가 느껴졌지만 언덕 위의 집들은 마치 거대한 야외 미술관처럼 수많은 벽화와 그래피티로 빛나고 있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는 독특한 승강기 ‘아센소르(Ascensor)’도 인상적이었다. 승강기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 내려다본 항구와 형형색색의 집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칠레 여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태평양을 바라보는 레스토랑 노가로(Nogaró)에서의 식사도 훌륭했다. 뇨끼와 리조또를 곁들인 생선요리, 연어 무스, 세비체와 디저트를 천천히 즐겼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태평양에 발을 담그고 싶어 하는 동료들과 바닷물 속으로 첨벙첨벙 들어갔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폰크 박물관 앞에 전시된 이스터섬, 라파누이의 모아이 석상도 만났다. 모아이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여행에서는 이런 작은 장난도 훗날 좋은 추억이 된다. 12. 파타고니아와 푸른 빙하 14일차에는 칠레 파타고니아 여행의 관문인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향했다. 바다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걸으며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보았다. 힐링, 또 힐링이었다. 15일차에는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을 산책하듯 둘러본 뒤 버스를 타고 네 번째 국가인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었다. 국경에서 우리를 맞아준 것은 뜻밖에도 여우였다. 남미에 와서 여우를 만나다니. 이 또한 행운이라 생각했다. 엘 칼라파테에서는 호텔 포사다 로스 알라모스(Hotel Posada Los Alamos)에 머물렀다. 고풍스럽고 따뜻한 분위기의 정원과 사우나, 골프장, 훌륭한 식당을 갖춘 호텔이었다. 특히 스테이크와 달걀프라이를 직접 구워주던 젊은 요리사와 그 음식의 맛을 잊을 수 없다. 16일차에는 개인적으로 신청한 페리토 모레노 빙하 투어에 나섰다. 먼저 바다 건너편에서 빙하를 바라본 뒤 배를 타고 이동했다. 비가 내려 이동하기에는 다소 불편했지만 눈이 시리도록 푸른 빙하를 직접 본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가이드들의 친절함은 감동적이었다. 아이젠을 직접 착용시켜 주고 빙하 위에서 세심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진도 정성껏 찍어주었다. 투어가 끝날 무렵에는 빙하 얼음을 넣은 칵테일과 초콜릿을 제공했고 산장에서는 따뜻한 차를 준비해 주었다. 친절 그 자체였다. 감동 그 자체였다. 차가운 빙하수도 직접 마셔보았다. 또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르헨티나 국기 아래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다가 문득 생각했다. ‘태극기를 가져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빙하 투어 중 한 현지 가이드가 나를 보고 영화배우 재키 찬을 닮았다고 했다. 역시 사람 보는 눈이 남다른 친구였다. 기분 좋게 웃으며 함께 사진을 찍었다. 13. 피츠로이와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 17일차에는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에서 피츠로이 산을 바라보며 트레킹을 했다. 장대한 강이 흐르는 평원과 산악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트레킹 도중 눈이 내렸다. 그 운치가 환상적이었다. 정상은 아니었지만 높은 곳에서 만난 넓은 호수도 감동적이었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카메라에 담았고 절벽 위에 자리한 둥지까지 포착하는 행운도 얻었다. 18일차에는 호텔 주변과 엘 칼라파테 시내를 여유롭게 걸었다. 아름다운 도시. 사람들의 마음에도 여유가 있는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비행기를 타고 우수아이아로 향했다. 남미 대륙의 최남단. 안데스산맥과 비글해협 사이에 자리한 도시. 남극과 약 1,000km 떨어져 있어 남극 크루즈의 주요 출발지로 알려진 곳.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에 도착한 것이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낭만적인 호텔도 마음에 들었다. 저녁에는 아르헨티나 전통 바비큐인 아사도와 뷔페식 식사를 푸짐하게 즐겼다. 너무 많이 먹었는지 일행과 함께 우수아이아의 야경을 즐기며 천천히 호텔로 걸어갔다. 19일차에는 비글해협 투어에 나섰다. 배에 오르기 전, 일출 무렵 이슬과 안개에 젖은 우수아이아의 바다 풍경은 잊을 수 없다. 비글해협과 케이프 혼 사이의 섬에서 카누를 이용해 살아갔던 야간(Yagán), 또는 야마나(Yamana) 사람들의 터전에도 올라보았다. 그리고 역시 사진. ‘사진은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표지 앞에서 찍어야 한다.’ 모두 ‘Ushuaia’ 표식 앞에 줄을 서서 사진을 찍었다. 비글해협을 상징하는 등대를 배경으로도 사진을 남겼다. 돌아오는 길에는 고래를 찾기 위해 바다를 열심히 살폈다. 잠시나마 흔적을 확인하며 이 바다에 고래가 살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우수아이아 개척기의 선원과 노동자들을 형상화한 마네킹 포토존을 만났다. 당연히 기대에 부응해 다양한 사진을 찍었다. 죄수와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을 통해 개척된 도시. 우수아이아의 아름다운 풍경 뒤에는 그런 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14. 부에노스아이레스, 남미를 다시 생각하다 20일차에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둘러보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과 레콜레타 묘역 일대, 필라르 성당을 방문했다. 옛 오페라 극장을 개조해 만든 엘 아테네오 그랜드 스플렌디드 서점은 책을 파는 공간을 넘어 하나의 문화유산처럼 느껴졌다. 라 보카 지구의 카미니토 거리에서는 원색으로 칠해진 건물과 탱고문화를 만났다. 금융가와 대통령궁도 둘러보았다. 그날 나는 남미를 조금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남미를 잉카를 비롯한 원주민 문명이 유럽인들에게 정복당한 공간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현장을 걸으며 생각은 조금씩 복잡해졌다. 원주민 문명과 유럽 문명은 충돌했고 수많은 비극을 만들었다. 그러나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서로 섞이고 변형되며 오늘날 남미만의 새로운 문화를 형성했다. 북아메리카와는 또 다른 역사였다. 인류 문명의 발달과 이동, 충돌과 융합이라는 더 넓은 시각에서 남미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에는 아르헨티나 소고기의 풍미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아사도를 먹었다. 저녁에는 품격 있는 식사와 함께 정통 탱고를 즐겼다. 18세기 건물에 자리한 엘 비에호 알마센(El Viejo Almacén)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바라본 탱고 공연. 남미 여행을 주선하는 어느 여행사도 쉽게 흉내 내기 어려운 프로그램이었다고 감히 생각한다. 21일차에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즐겼다. 갈레리아스 파시피코의 아름다운 천장 벽화와 건축, 산 텔모 시장의 활기, 거리 카페에서 즐긴 빵과 커피, 그리고 여인의 다리…. 이후 브라질 이과수로 향했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를 이렇게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다. 브라질 이과수의 윈덤 골든 포즈 스위트에서의 숙박은 여행의 편안함과 격조를 한층 높여주었다. 15. 이과수, 물이 만들어낸 압도적인 세계 22일차에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을 오가며 이과수 폭포를 온몸으로 즐겼다. 우리나라의 폭포를 생각하면 하루 종일 폭포를 본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과수에서는 가능했다. 아니, 하루 종일 보아야 했다. 끝없이 떨어지는 물.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작은 물방울. 햇빛 사이로 나타나는 무지개. 보트 투어에서 온몸으로 맞은 거대한 물벼락. 나는 그 모든 순간을 생동감 있게 담기 위해 개인 카메라를 거의 희생하다시피 하며 사진을 찍었다. 덕분에 좋은 사진을 많이 확보했다. 함께 여행한 동료들도 무척 만족해했다. 고생한 카메라에 조금은 미안함이 덜해졌다. 가족과 함께 온 외국 여행객들의 사진도 찍어주었다. 사진을 확인한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사진으로 작은 국위 선양을 한 것 같아 기분도 좋았다. 스마트폰으로 누구나 쉽게 사진을 찍는 시대다. 그러나 사진의 기본을 알고 찍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물질문화의 풍요 속에서 기본기의 빈곤이라….’ 16. 리우데자네이루, 대서양과 예수상 23일차에는 이른 출발을 위해 현지 가이드님의 사모님이 정성껏 준비한 김밥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참 맛있는 김밥이었다. 비가 내리는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해 케이블카를 타고 빵산에 올랐다. 안개가 끼고 비가 내렸지만 여행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늘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즐겼다. 그곳에서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와 친구들을 만났다. 결혼 전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현지의 전통이라고 했다. 예비 신부와 친구들의 단체 사진을 멋지게 찍어주었다. 이후 케이블카에서 다시 만난 신부와 함께 사진을 찍는 영광도 누렸다. 저녁 식사 후에는 리우의 밤바다로 나갔다. 대서양에 발을 담갔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밤바다를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고 리우 해변의 밤 문화를 즐겼다. 가이드의 걱정을 뒤로하고…. 물론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했다. 24일차 새벽에는 호텔 옥상에 올랐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일출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태양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 역시 여행의 묘미다. 출장 중이던 현지인 한 사람도 일출을 보기 위해 옥상에 올라왔다. 그의 멋진 사진도 찍어주었다. 멀리 보이는 빵산과 떠오르는 태양이 아름다웠다. 아침 식사 후에는 브라질을 대표하는 거대한 예수상을 찾았다. 모두 예수상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세상을 품는 예수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 역시 앞으로 사람을 대할 때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품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상 아래의 작은 기도 공간도 인상적이었다. 구름에 둘러싸인 빵산과 바다, 깨끗하고 푸른 하늘이 어우러진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오후에는 자유롭게 해변을 걸었다. 산책 중 옥수수를 파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해수욕장에서 보던 풍경을 남미에서 만나다니.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옥수수를 통째로 쪄서 팔지만 이곳에서는 알을 떼어 접시에 담아 판매한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해수욕장에서 옥수수를 간식으로 먹는다는 것은 똑같았다. 사람 사는 곳은 통하는 모양이다. 저녁에는 록시 디너 쇼(Roxy Dinner Show)를 찾았다. 브라질의 화려한 문화와 삼바를 식사와 함께 즐기는 공연이었다. 거대한 무대와 압도적인 공연, 격조 있는 식사. 그 모든 것을 마음껏 즐겼다. 한국이나 중국 관광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극장 측의 배려로 입구 무대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출연 배우들과 함께 사진도 남겼다. 그날의 여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7. 마지막 날, 그리고 다시 시작 마지막 일정인 25일차. 브라질을 대표하는 슈하스코 식당 포구 지 샹(Fogo de Chão)에서 점심을 먹었다. 웨이터가 다양한 부위의 고기를 테이블로 직접 가져와 즉석에서 썰어주는 로디지오 방식의 식사였다. 맛있는 고기와 풍성한 샐러드바. 세계적으로 알려진 식당에서 제대로 대접받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식사 후에는 테라스 앞에 펼쳐진 바다와 요트, 멀리 보이는 빵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청명한 날씨까지 더해져 모두의 표정이 밝았다. 이후 리우 메트로폴리탄 대성당과 셀라론 계단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천장에서 바닥까지 이어지는 대성당의 내부는 압도적이었다. 전 세계에서 모은 타일로 만들어진 셀라론 계단을 보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공간도 누군가 의미를 부여하고 사람들이 함께 그 의미를 공유하면 특별한 장소가 된다. 좋은 생각과 공동체의 기억, 때로는 종교적 심상이 더해진 장소에는 사람들이 모인다. 문화유산을 공부하고 기록해 온 나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공간이었다. 이제 한 달여의 대장정을 마치고 귀국할 시간이었다. 기상 여건으로 일정이 변경되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페루 리마와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2026년 4월 5일 아침 일찍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했다. 큰 탈 없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자축했다. 공항 2층 식당에서 먹은 김치찌개. 그 한 그릇에 지난 한 달의 피로가 모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18. 사진 2만 장, 그리고 나의 남미 남미에서 한 달여 동안 찍은 사진은 약 2만 장이었다. 여행을 함께한 동료들의 사진을 한 사람씩 분류해 보내주었다. 그리고 남미의 여정을 잘 보여주는 풍경과 단체 사진, 개인 사진을 날짜별로 정리했다. 국가별로 구분해 모두 다섯 편의 여행 영상을 만들었다. 배경음악도 넣었다. 영상 제작에 사용한 사진만 약 3,300장. 스마트폰용과 TV 감상용 고화질 버전을 각각 만들었다. 완성된 영상의 전체 용량은 약 11.6GB였다. 카카오톡 단체방을 통해 영상을 공유하고 고화질 영상은 7월 6일에서야 모두 완성하여 동료들에게 이메일로 따로 보내주었다. 사진을 고르고 영상을 만드는 동안 나는 다시 남미를 여행했다. 이카의 사막을 걷고, 쿠스코의 축제 속으로 들어갔다. 우유니의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페리토 모레노의 푸른 빙하 위에 다시 섰다. 이과수의 물벼락을 맞고 리우의 대서양에 다시 발을 담갔다. 좋은 여행상품을 만들어 준 ‘세상에 없는 여행’ 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린다. 여행 내내 세심하게 안내해 주신 모든 분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무엇보다 한 달 가까운 시간을 함께 웃고 걷고 먹고 사진 찍으며 여행한 동료들에게 감사한다. 여행 후기를 여기까지 쓰고 나니 이제야 남미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의 푸르고 푸른 빛. 우유니 소금사막 위에서 바라본 거대한 은하수. 쿠스코 축제에서 만난 잉카 후예들의 맑은 눈과 순수한 표정. 이과수에서 온몸으로 맞았던 물방울. 그리고 남미 대륙의 끝에서 바라본 바다…. 이 모든 풍경은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36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떠난 남미. 나는 세상의 끝을 향해 갔지만, 그곳에서 또 다른 시작을 보았다. 이제 다시 신발끈을 맨다. 그리고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향해 걸어가려 한다. 세상의 끝에서 또 다른 세상의 시작을 보았다. 다시, 신발끈을 매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여행지
페루스페인포르투갈이카 사막타카마와카치나대서양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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