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조금 지쳐있었다. 무작정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반드시 떠나야 했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하지만 여행지를 고르고 여러 정보를 검색하고 확정하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쉽게 훌쩍 떠날 수 있는 일본이나 홍콩 같은 곳을 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또다시 찾았다, 트래블러스맵을. 모든 것이 내 손을 떠난 패키지여행을 원치 않으면서도 정작 모든 선택지 앞에선 뒤로 숨어버리고 싶은 나의 모순과 타협할 수 있는 곳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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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카트만두 도착
카트만두 자체가 고도가 높은 탓이었을까. 비행기에서부터 시작된 멀미 증상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극에 달았다. 그 와중에 비자 신청은 예상과 달리 꼬여버렸고, 그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던 나는 공항에서의 환전과 유심 구입을 모두 포기하고 바깥 공기를 쐬러 나갔다. 그리고는 픽업 서비스를 나온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숙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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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카트만두~포카라
개인적으로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포카라. 그곳은 정말이지 할 게 없었다. 그저 호수를 바라보며 늘어져 있는 것밖에. 조금 바지런 해지자면 호수 위에서 배를 타거나 근처를 산책할 수 있다. 아주 극도로 바삐 움직인다면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것 정도. 그게 바로 포카라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게으름이 허락되는 곳. 물론 관광객에만 해당되는 허용치일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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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트레킹(나야풀~힐레~고라파니~푼힐~타다파니~간드룩)
트레킹을 시작하자 자연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풍경들이 펼쳐졌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곳에 가고자 인간이 만들어낸 자동차를 타고 온갖 인공품을 짊어지고 가는 나의 모습이 일견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저런 생각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저 나는 걸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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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내내 주로 만난 계절은 겨울이었다. 고요하지만 엄청난 생명력을 품고 있는, 그래서 소리 없이 하얀 에너지를 품어내고 있는 풍경들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이 트레킹의 매력 중 하나는 이 산이 여러 계절을 품고 있다는 것. 걷다가 시선을 낮추면 작게 피어 있는 야생화를 만나기도 하고 미처 눈이 닿기 전에 코끝을 찔러오는 달콤한 향에 주변을 둘러보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뚜벅뚜벅 여러 계절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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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서 지내는 나는 일상의 나와 많은 부분이 달랐다. 아침에 눈을 떠서 열심히 먹고 걷는 삶에 충실하고, 시간 체크와 사진 촬영 이외의 용도로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게 변화의 전부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그 두 가지가 매우 컸다. 그리고 또 다른 큰 변화. 시계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외출을 할 때마다 손목시계를 차고 생활 속에서 수시로 시간을 체크한다. 어느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마다 동선이나 메일을, 혹은 각종 정보를 체크한다. 그것도 아니면 팟캐스트를 통해 시사정보 따위를 섭렵하거나 책을 뒤적인다. 모든 시간을 빽빽하게 채우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곳에선 숫자와 단위로 나누어진 시간을 빈틈없이 쌓기보다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 내 몸을 시간에 끼워 맞추기보다 시간이 내 몸을, 나를 흐르게 두었다. 그렇게 나는 자유를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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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포카라, 카트만두 자유여행
포카라에 도착해 중국인 친구들을 만났다. 5명이 함께 식당에 가니 다양한 메뉴를 시킬 수 있어 신이 났다. 모모, 뗀뚝, 초우멘, buff 고기라는 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음식 등등 여러 개를 시켰다. 그리고 가장 기대했던 네팔 전통주 퉁바(Tongba). 발효시킨 조와 비슷한 곡식이 통에 넉넉하게 채워져 나오고 따로 제공된 뜨거운 물을 부은 뒤 꽂혀 있는 빨대로 마시면 된다. 텁텁하지 않은 막걸리 맛이랄까. 달달하면서도 느껴지는 알딸딸함이 좋았다. 들어갈 때 손님이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시키는 모든 메뉴가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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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에 도착해서도 새로운 음식 탐방은 계속되었다. 이번에도 가이드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의 말로는 영어로 적힌 메뉴판에는 아예 제시되지 않은 음식이라고 했다. 아무리 발음을 따라 하고 기억해보려 노력했지만 결국 단어는 휘발되고 그 맛만 선명한 음식들. 하나는 네팔에서 종종 먹었던 달(dal)의 일종 같았는데 전에 먹었던 것과 확연히 다른 맛이었다. 감자와 약간 매콤한 국물 맛은 엄마가 자주 끓여주었던 고추장찌개와 유사했지만 함께 들어간 대나무의 향이 지배적이라 전혀 다른 느낌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부침개와 비슷한, 다시 먹고 싶은 그것은 쌀가루를 베이스로 하고 고기나 렌틸콩, 계란 등을 넣어 부친 뒤 커리같은 소스에 찍어 먹는 음식이었다. 늘 그러하듯 적당한 기름기 허기를 달랬고, 콩이 고소하게 씹혔다. 약간의 느끼할 수 있는 맛을 독특한 소스로 균형감을 잡아주었다. 모든 문화가 그러하겠지만 음식을 베어 물면 한 사회가 입안에 들어온 느낌이다. 그 공간의 자연환경과 그곳을 스쳐 지나간 시간 속의 인문환경이 어우러진 결과물이 내 몸속에 퍼져나가는 기분이랄까. 역시, 여행의 정점은 음식이다.
6. 에필로그
가이드는 물었다. 자신은 좋은 가이드였냐고. 글쎄. 사실 모든 것이 그렇듯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모두 있었다. 프로답지 않은 풋풋함 때문에 종종 불편했고, 그 때문에 그저 현지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다니는 여행 같았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점은 네팔이라는 공간, 그곳의 사람들 사이의 좋은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네팔어에 능통했고, 현지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무엇보다 처음 보는 이에게 다정히 말을 건네는 친화력이 있었다. 경험이 별로 없어 서툴렀지만 그래서 자유로웠다.
나는 분명 자연을 보러 네팔에 갔는데 기억에 남는 건 이번에도 역시 사람이었다. 길을 걷기 위해 떠났지만 나를 가슴 설레게 한 것은 걷는 행위보다는 걸으면서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많이 어긋났고, 조금 서툴렀지만 사람을 담아오기엔 너무나도 충분했던 여행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