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도우미로 힘쓰던 중 손자가 두 돌에 이를 즈음, 나와 남편은 큰딸과 사위의 적극적인 권유로 북유럽여행을 신청하고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기 23일 전, 96세의 시어머니께서는 자가 면역질환으로 피부에 대형 수포가 생기는 일명 ‘천포창’이 심해져 극기야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담당의사는 “환자가 고령이시라 세균 감염 시 패혈증과 약물로 인한 심정지도 있을 수 있습니다”라며 만약의 경우에 대해 준비해야함을 알린다.
틈틈이 북유럽 관련 책을 빌려다보면서 일상에서 떠난다는 기쁨에 젖어 있었는데, 큰 복병을 만난 것이다. 결국 남편은 여행을 취소했다. 위약금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다가 작은 딸이 직장에 양해를 구하고 가기로 했다.
손자를 돌보면서 시어머니 병원까지 들락거리다보니 부실해진 몸은 감기를 당연히 맞아들이고, 여행에 들떴던 마음은 어느새 시들해졌다. 떠나는 날은 심지어 배까지 아프고 기침은 끊어지질 않아 주변에 민망하고 불편한 존재가 되어 좌불안석이다. 이미 준비해 가는 약은 있었지만, 다급함에 공항 내 약국에 들려 상담을 하니 초로의 남자 약사는 그동안 기력이 쇠한 것 같다며 산삼 액 두병을 권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산삼 액 두병과 한방소화제 값으로 오만 팔천 원을 거침없이 지불하며 과한 값에 다소 어리둥절하였으나 어찌하랴.
이번 여행은 세미패키지로 반나절 워킹투어를 하면서 현지 가이드의 설명과 현지 식을 먹고 나머지 일정은 개인이 자유로 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행이란 생각에 안타까웠으나, 딸과의 여행이 어쩌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하며 내심 기뻤다. 자기 일로 바쁜 딸이 언제 이렇게 여러 날을 엄마랑 같이 웃으며 다닐 수 있겠는가. 아직 미혼인 작은 딸은
“아빠한테는 죄송하지만 할머니께서 내게 마지막으로 주시는 선물 같네. 남자를 보내 주시는 대신....ㅎㅎ 암튼 감사하네.”
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딸과 다니다 보니 참으로 많은 것들이 편하고 즐거웠다. 평소 사진 찍는 것이 취미인 딸은 나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둘만의 셀카찍기로 즐거움을 업 시킨다. 먹는 것도 딸과 먹으니 더 맛이 있었다. 맛 집과 봐야할 곳을 검색하며 반나절의 일정을 딸은 알차게 준비했다. 떠나올 때부터 나를 힘들게 했던 잦은 발작적 기침도 어느새 북유럽의 맑은 공기와 남이 차려주는 밥상으로 호사를 누리다 보니 어느새 물러가 버렸다. 딸은 엄마가 이곳에서 충분히 힐링하고 가야한다며 맛 집 찾기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호텔 방에서도 딸과 함께 하니 집처럼 편했다. 엄마의 약을 챙기고 먼저 씻고 주무시라며 양보하는 딸을 보면서 어느새 나의 보호자가 된 딸로 흐뭇하기도 했지만, 서른을 훌쩍 넘긴 딸이 ‘어서 짝을 만나야 할 텐데....’란 내재된 간절함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반나절 이상을 딸과 여러 곳을 누비며 북유럽의 자연과 상쾌한 공기에 감탄사를 연발했던 우리의 모습들은 언제고 오버랩 될 것이고, 우리는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 오슬로 오페라 하우스
오슬로의 오페라하우스를 보며 하늘 향해 올라가듯 설계된 건축미에 환성을 토했고, 이곳 사람들이 일광욕을 하도록 배려하여 바닥을 마치 해변처럼 조성함에 놀라워했다. 오페라 하우스의 로비가 부드러운 목재의 색감과 질감을 그대로 살려 예술성을 맘껏 뿜어낸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한참을 머물며 바라보게 했다.
▲ 베르겐 호수
베르겐의 작은 호수 주변의 숲에선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서 둘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다. 지금껏 쌓인 온 몸의 찌꺼기가 청소되는 기분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새처럼 날 것 같은 기분은 어디서도 맛보지 못함이었다.
▲ 코펜하겐 뉘하운
코펜하겐 뉘하운에서는 유람선을 타고 주변의 풍광에 취하여 서로 셔터를 눌러주며 맘껏 포즈를 취해봄도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해프닝이다.
스톡홀름에서의 마지막 날은 오전에 트램을 타고 유르고덴지구의 로젠달 가든에 갔다. 이 날의 뜨거운 햇살은 온실카페에서 특별한 커피조차 마실 인내를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잠시 둘러보다 75분 내에 트램을 타려고 탈출 하듯 빠져나왔다. 우리는 다시 시내로 와서 쇼핑도 하고 꼭 먹어보라고 추천하는 미트볼 집에선 야외 테이블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기도 했다.
▲ 실자라인 크루즈
실자라인 크루즈에서는 방의 창을 통해 수평선 너머로 매일 뜨고 퇴장하는 성실한 태양의 실체를 감히 눈을 감지도 않고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는 딸과의 장소와 시간, 느낌을 공유함이 아마도 큰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훗날 서로 즐거워하며 떠들 것이란 예감이 확실함은 북유럽이 주었던 수많은 매력과 주도적으로 찾아가며 즐기도록 기획된 여행사 덕분이다. 여행 내내 딸과 밀착해서 곳곳을 다녔지만 끝까지 가지는 않았다. 여행 이틀을 남겨두고 딸은
“엄마, 마지막 이틀은 우리 각자 둘러보자. 나 혼자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모처럼의 해외여행이고 이 곳까지 왔는데...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고 싶거든....ㅎㅎ 괜찮지?”
“그래, 그러자. 한번 정신 차리고 길 찾아 다녀보지 뭐. 헬싱키는 작은 도시라니 뭐가 어렵겠어. 걱정하지마라.”
요즘 젊은이들이 누가 부모랑 다니는가. 다들 친구들과 자유여행을 하던지 혼자 다니지...그래도 이번 여행은 완전 패키지가 아니고 소수의 인원이 반나절이상을 각자의 스케줄로 행동 하도록 되어있으니 그나마 딸도 견디기 쉬었으리라. 대답은 시원하게 내 뱉었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와이파이 공유기를 딸이 갖고 다니기에 이제부터 나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의 세대는 아날로그로 꽤 살아보았기에 그다지 두려울 것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애써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홀로 찾아가는 재미는 쏠쏠했다. 약간의 흥분으로 인해 심장도 제 기능을 활발히 하는 것 같고, 가고자 하는 곳을 물어물어 찾아서 바로 만나면 희열감과 자신감도 생겼다. 모르는 사람에게 인증 샷도 부탁하고, 무엇보다 홀로 벤치에 앉아서 바라보는 이국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여유로움이 좋았다. 슈퍼마켓에 들려 딸이 좋아할 간식거리도 사면서 이것이 참 여행이다 싶었다. 혼자였기에 더 깊이 보고 생각하는 여유가 생기는 것인가.
▲ 시벨리우스 공원
시벨리우스 공원을 찾아 가는 도중 길가의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도로 공사장의 기계소리만 나서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밝은 햇살과 상쾌한 공기는 이내 어두운 생각을 몰아내 주었다. 양쪽으로 길게 쭉 뻗은 녹음 짙은 나무를 올려다보며 걷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가 없었다. 공원의 파이프조형물 앞에선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두 팔을 하늘 향해 뻗고 인증 샷을 부탁하면서 이내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와 당혹하기도 했다. 햇빛 찬란한 호숫가를 선글라스를 쓰고도 눈이 부셔 얇은 책자로 그늘을 만들고 걷는 나, 삼사오오 속살을 드러내고 일광욕을 하는 이곳 사람들- 나는 영락없는 이방인이었다.
헬싱키 대성당으로 가는 길, 골목의 작은 디자인 소품 숍들과 갤러리의 그림 감상은 소소한 기쁨을 안겨주었다. 키아즈마 현대미술관에서의 작품 감상도 혼자이기에 그림에 대한 해석을 나름 심도 있게 해보는 여유를 가짐도 좋았다.
이번 여행은 일반 패키지여행과 달리 일정에 쇼핑센터를 들리는 일이 없어서 좋았다. 대신 홀로 스토크만 백화점에서 마리메꼬 가죽 가방을 50% 세일에 텍스리턴까지 아주 착한 가격에 구입하여 돌아오자마자 열심히 들고 다니고 있다. 또한 호텔 조식 외에 하루 한 끼 제공된 현지식의 식당선택이 타 여행사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마지막 날 찾아간 침묵의 교회에서는 여행의 마무리를 함에 특별한 감동이 밀려와 한참을 머물며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우여곡절 가운데 오게 된 딸과의 여행이 감사하고, 불편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서 감사했다. 또한 나의 지금까지의 인생 여정을 통해 함께 하신 주님의 은혜가 온 몸과 마음으로 느껴져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 또한 혼자이기에 경험하게 된 것이리라.
딸과의 밀착여행도 좋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제안한 딸의 지혜로움에 칭찬을 하고 싶다. 또한 세미패키지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트래블러스맵 여행사의 개성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언제고 또 다시 해외여행을 간다면 이러한 방식을 택해 가고 싶다. 남편하고든 친구하고든...그러나 또다시 딸과 함께 가고 싶다. 다음엔 큰딸과 가야지? 큰 딸은 우리가 보낸 사진을 보며 은근히 시샘하는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기에.....유진아! 담엔 너랑 가고 싶다. 너도 좋지? 주안이는 집안의 두 남성분들에게 맡기고...ㅎ
2018.7
*p.s. 인솔자 루피님의 훈훈한 인상과 친절함은 여행 내내 편안하고 든든했습니다. 덕분에 모두가 무사히 즐겁게 여행을 마쳤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트래블러스맵의 보이지 않는 홍보자로 활동할 것 같네요....^^
* 2018년 6월 트래블러스맵 북유럽여행을 다녀오신 김인*님께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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